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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 드라마 | 2011.08.11 | 12세 이상 관람가 | 111분
감독 질레스 파케-브레네 | 출연 크리스틴 스콧 토머스, 멜루지네 메이앙스
'그을린 사랑'을 보았다면 '사라의 열쇠'도 보라는 얘기에 '사라의 열쇠'도 보았습니다. 아마도 두 영화가 다루는 이야기가 전쟁의 참상을 다루었다는 것과 주인공이 여자라는 공통점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좀 실망이었습니다. 왜 그런가? 한 이틀 정도 그 생각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인물들이 제 역할이 없어서 필연성의 부재로 이어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1. 사라의 열쇠 - 필연성의 부재
영화 초반에 등장했던, 수용소를 탈출하는 여자부터 따져볼게요. 그녀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수용소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희망(?)을 너무 쉽게 던져두고 영화 밖으로 떠납니다. 핀으로 자기 입 안을 쑤셔서(?) 피가 나오게 한 뒤, 환자 행세를 하며 의무실 (비슷한) 곳으로 가서는 의사인지 담당자인지 모를 사람과 몇 마디 하고는, 환한 햇빛 속으로 걸어 나갑니다. 영화는 멀리서 그녀의 모습을 비추고 있기 때문에 그녀가 누구와 어떻게 어떤 거래를 했는지는 모른다. 햇빛이 하도 강렬하여, 그녀의 실루엣이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는 장면은 어린 사라, 혹은 사라의 부모 눈에는 사막의 어른거리는 신기루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결코 잡을 수 없는 신기루처럼 탈출하지 못할 것을 예감하는 장면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어두운 출구에서 환한 햇빛 속으로 또박또박 걸어 나가는 장면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거로 그녀의 역할은 끝입니다. '아니, 수용소를 빠져나가는 게 그렇게 쉬웠어?? 우여곡절 끝에 탈출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쉽게 빠져나갈 수 있는 정도라면, 애초에 잡혀오지도 않지 않았을까? 혹은 그렇게 쉽게 빠져나갈 수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왜 바보 같이 탈출을 시도조차 않는 거지?' 하는 의구심만 들었어요. 그 뒤로 그녀의 역할은 없습니다. 그저 쉽게 탈출할 수도 있는데 사라 가족은 못하고 있다는 정도! 그런데 그게 무슨 연관성이 있어야 공감을 할 텐데 이게 뭐지 싶었어요..
둘째, 사라가 수용소를 탈출할 때 도움을 준 군인 이야기입니다. 사라는 벽장 속에 동생을 가두고 나왔기 때문에 동생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함께 수용되었던 한 여자애와 탈출을 시도하는데, 탈출 장면에서 한 군인에게 들키고 맙니다. 그 군인은 전에도 한번 사라가 사과를 먹을 수 있도록 도와준 적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철조망을 넘으려는 아이들을 잡았는데, 사라가 사과를 먹게 해 줘 고마웠다는 깍듯한 인사와 함께 동생을 구해야 한다며 애원을 하니까 철조망을 잡아주기까지 합니다. 그 바람에 손에 상처까지 나지요. 저는 그 장면에서 '저 상처 때문에 저 군인이 어려움을 겪겠구나, 그리고 또 연관된 이야기가 전개되겠구나' 했는데 그걸로 끝이었습니다. 다시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 군인은 사라를 왜 도와준 거지요? 물론 어린아이가 자기 동생을 구해야 한다고 애원하니까 불쌍했겠지요. 하지만 무슨 필연성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 군인의 대사에서 무슨 메시지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좀 망설 망설 하다가 그냥 도와주고 끝!
셋째, 수용소를 탈출한 소녀들이 어느 인가를 찾게 됩니다. 처음에는 꺼지라며(?) 내쫓던 부부가 다음날 곳간에서 자고 있던 아이들을 보고 바로 돌보기 시작합니다. 물론 유대인 아이들일 거라고 추측해서 거부했다가, 아이들이 불쌍해서 도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부부는 특별한 계기가 없이 사라를 적극적으로 도와줍니다. 사라가 살던 집까지 동행해 주지요. 기차에선 사라의 신분증 대신 뇌물까지 미리 챙겨 역무원인지 경찰인지 모를 사람에게 건네기까지 하면서 사라를 위기에서 구해줍니다. 사라의 방 벽장에서 죽은 남동생을 목격하는 그 역사적인 순간에도 함께 합니다. 그리고 갈 곳 없는 사라를 자기 집으로 데려와 어른이 될 때까지 돌봐 줍니다. 다 좋아요.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부부가 사라를 돕는, 무슨 계기가 있어야, 그래야 영화에 빠져들지 않을까요? 그저 비극적인 한 소녀가 불쌍하다는 이유만은론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아니, 그 소녀가 불쌍해서 도왔다고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이후 무슨 사건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뭔가 있겠지.' 하면서 영화를 보았지만, 그 이후에도 그 부부의 역할은 큰 비중이 없습니다. 저와 영화가 계속 겉도는 느낌이었어요.
2. 사라 이야기
이제 사라 이야기입니다. 사라는 평생 자기가 남동생을 죽였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평생을 괴로워하며 살아갑니다. 결국은 교통사고로 죽는데, 알고 보면 자살입니다. (사라의 아들은 자기 엄마의 비극에 대해선 눈곱만큼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저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알고 있다가 나중에 엄마의 비극을 알고는 통한의 눈물을 흘리는데 이것도 좀 이해불가입니다. 이건 좀 있다 얘기하지요.) 사라가 자살로 자신의 삶을 마감한 거라든가, 평생 괴로워하면서 살았던 거라든가, 그건 십분 이해합니다. 그런데 자신을 돌봐주던 그 부부의 집을 떠날 때의 사라 행동은 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냥 떠나겠다는 편지 한장 덜렁 써놓고 몹시 괴로워하는 듯이 떠나는데 왜 그래야 하지요? 그 집에 살면서 무슨 사건이 있었나요? 예를 들어 그 집 아들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했다거나, 아니라면 견디기 힘든 또 다른 사건을 겪었거나...... 그것도 아닙니다. 그래도 사라의 행동을 이해하려고 생각하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심리적으로 불안한 여자의 삶이니까, 어쩌면 정신적으로 온전치 못한 삶이니까 좌충우돌할 수도 있고, 우울증을 겪으며 무기력하게 살아갈 수 있으니까요.
영화는 관객들에게 자꾸 '사라가 불쌍하다, 사라를 이해해라, 빨리 감동해라!'하는 것만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냉정하겠지만, 그 시절에 사라와 비슷한 비극을 겪은 사람이 어디 사라뿐이겠습니까. 멀리서 찾을 것도 없습니다. 한국 전쟁을 겪은 한국의 어머니들을 보세요. 우리 어머니만 해도 당신 표현을 빌자면 '(어머니가 겪은 전쟁을) 책으로 쓰면 백 권을 쓸 정도의' 삶을 사셨고, 딸인 제가 봐도 그렇습니다. 제 말은 사라가 불쌍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 한이 오죽하겠습니까!) 사라의 삶을 영화로(작품으로) 그리려면 '책으로 쓰면 백 권도 넘을 정도의' 많고 많은 이야기 가운데 하나인 사라의 삶을 차별성 있게 그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사라의 심리 묘사에 치중했더라면 좀 공감을 했을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을린 사랑'의 여주인공 나왈과 사라가 비교됩니다. 나왈 또한 사라 못지않은, 어쩌면 사라보다 더한 비극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비극의 깊이를 따질 수는 없는 거겠지만요. 하지만 나왈은 그 고통 속에도 긍정의 힘으로 살았고 희망의 메시지를 남겼지만, 사라는 맥없이(?) 살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을린 사랑에는 주인공의 삶이 있는데, 사라의 열쇠에는 사라의 삶이 없다는 게 가장 비교되는 점입니다.
줄거리를 간단하게 정리해 볼게요. 프랑스에서 유대인 학살이 있었고, 유대인인 한 소녀가 남동생을 구하겠다는 생각으로 동생을 벽장 속에 가두고 열쇠를 챙겨 수용소로 끌려왔습니다. 그 소녀는 동생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수용소를 탈출하여 집으로 갔지만, 동생은 벽장 속에 죽은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그 뒤로 죄책감에 시달리던 한 여인이 결국은 자살로 삶을 마감하였습니다. '사라가 동생을 벽장 속에 가두고 열쇠를 챙겨왔는데, 다시 동생을 찾았을 때 동생은 이미 죽어있었습니다.'는 소재로 전쟁의 참상을 알리는 분명한 메시지가 있지만, 주변 인물들의 역할이 미미해서 크게 공감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이 영화는 과거 사라 이야기와 현재 줄리아 이야기가 씨실과 날실처럼 교차하면서 진행이 되는데요, 이제 줄리아 이야기를 해 보지요. 줄리아는 사라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사라가 살던 집에 줄리아의 시아버지가 (아마도 사라와 엇비슷한 또래) 들어와서 살게 됩니다. 사라가 남동생을 구하러 막 달려왔을 때, 문을 열어준 사람도 줄리아의 시아버지입니다.
그러니까 줄리아의 시아버지는 그 모든 상황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추측건대 그냥 들어와 산 것도 강탈일 수 있다면 줄리아의 시아버지네가 유대인이 살던 사라집을 강탈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미안한 마음에서 시할아버지는 사라를 돌봐주는 부부에게 돈을 보내준 것 같습니다. 아무튼 현재, 줄리아는 프랑스 남편과 결혼한 미국인이고, 기자 일을 하고 있고, 유대인 학살에 관한 기사를 쓴 적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집을 장만하였는데, 그 집이 유대인 학살에 관련된 집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집의 역사에 대해 파헤치다가 사라의 비극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영화 후반부에 사라의 아들이 등장하는데, 위에서 썼듯이 성인이 된 사라의 아들은 그때까지 자신의 엄마에 대한 걸 까마득히 모르고 있습니다. 주변에서 모두 비밀로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변에서 그 이야기를 왜 그렇게 비밀로 하려고 했는지, 아들이 완전 성인인데 그때까지 그렇게 쉬쉬했던 게 좀 이해가 안 됩니다. 그 사건이 끔찍하긴 하지만, 그렇게 비밀로 쉬쉬할 정도는 아니지 않나 싶습니다. 쉬쉬할 수밖에 없는, 무슨 필연성이 있어야 하지 않나 싶은 거예요. 아들이 어려서 사라가 자살을 했기 때문에 (교통사고를 위장한 이 자살도 사실은 추측입니다) 말할 수 없었고, 또 사라의 남편이 재혼을 했기 때문에 굳이 말할 기회가 없었다고 치지요. 엔딩 장면이 줄리아와 사라의 아들이 사라를 떠올리며 통한의 눈물을 흘리는 장면입니다. 그렇다면 사라의 아들도 매우 중요한 역할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거의 영화 후반부에 등장하여 줄리아에 의해 모든 걸 알게 된 뒤, '이럴 수가! 어머니가 이런 삶을 살았다니! 그러다 자살까지 하셨다니! 오, 가엾은 어머니!' 하는 장면은 좀 뜬금없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아들로서의 역할이 부족하다는 느낌입니다.
줄리아 얘기를 하자면, 줄리아도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는데, 줄리아는 왜 남편과 자꾸 대립을 하는 거지요? 남편 집안이 사라네 집을 강탈(?)했기 때문에 증오심이 생겨서일까요? 아무튼 줄리아가 뜻하지 않게 임신을 하였는데, 남편이 좋아하지 않는다고 히스테리 수준으로 삐치는데, 남편의 말은 '큰딸도 있고, 이제 안정되었다, 그래서 임신이 반갑지 않다'는 건데, 줄리아는 그전을 생각하면 이러면 안 되지 않느냐는 내용의 말을 합니다. 저는 줄리아가 큰딸을 낳기 전, 혹은 그 후에 무슨 사건이 있는 줄 알았어요. 예를 들면, 임신이 안 되어 매우 어려움을 겪었거나, 그래서 큰딸을 입양했다거나. 그런데 거기에 대한 해명은 없다. 남편의 주장이 냉정하긴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주장은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거기에 대한 사라의 행동이 너무 신경질적인 반응으로 일관합니다. 그녀가 그럴 수 밖에 없는 까닭이 드러나면 공감할 수 있겠는데 그렇지 않으니 좀 오버한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녀의 신경질적인 반응을, 사라 이야기와 자연스럽게 연결되면 공감할 수 있겠는데, 막연히 사라의 비밀을 알게 된 줄리아가 괴로워하고, 자신의 임신을 기뻐하지 않는 남편에게 화를 내는 게 잘 연결이 안 됩니다. 영화를 한 번 더 보면 찾을 수 있을까요? 줄리아가 사라의 이야기를 파헤친 건 좋은데, 기자이니까 필연성이 있습니다. 자신과의 사이에 연관성이 있는 것도 좋은데, 자기가 우연히 사라의 집을 사게 되었으니 필연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줄리아의 행동은 좀 오버하는 느낌이 듭니다. 인물들이 자기 역할을 충분히 잘 해내고, 인물들 사이의 연결고리가 좀더 쫀득했다면 (영화 초반에 등장했다가 사라진다거나, 중요한 인물인데도 영화 후반부에 등장하여 큰 역할 없이 끝난다거나, 하는 것이 아닌...) 백 권도 넘게 쓸 수 있는 많고 많은 이야기 가운데, 전쟁의 참상을 잘 전달한 훌륭한 작품이 나오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문득 생각이 났는데, 전쟁이란 인간들의 욕심, 잔인함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요? 따라서 전쟁 이야기에는, 인간의 잔인함이 밀도 있게 묘사된다거나, 그 가운데서도 싹트는 인간 본연의 인류애 같은 게 등장해야 나도 모르게 영화에 빠져들기 마련인데 '사라의 열쇠'는 전쟁은 있는데, 그 대척점이 없어서 긴장감이 떨어진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인간의 잔인함이라거나, 그 속에서 싹트는 사랑이야기 같은 게 없습니다. 오로지 '사라의 열쇠', 그것만 강조하고 있고 관객에게 감동만 요구하고 있습니다.
3. 의미 없는, 열쇠의 의미
'열쇠'라는 말은 어려운 문제를 풀 때 사용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사라의 열쇠가 동생을 가둔 벽장의 열쇠이기도 하지만, 이 영화가 두 이야기가 교차하는 것이므로, 퍼즐 조각 맞추듯 이야기를 맞춰보라는 의미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는 동안 상황들이 공감가지 않아서 왜 저러지? 왜 저러지?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습니다. 마지막 장면은, 줄리아가 결국 남편이 원하지 않은 아이를 낳았고, 사라의 아들과 만나서 얘기를 나누는 장면입니다. 줄리아는 자기 딸의 이름을 '사라'라고 지었고, 줄리아와 사라 아들이 '오, 사라' 하면서 혼자 놀고 있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영화는 끝납니다. 이 장면은 새롭게 태어난 사라를 잘 지켜주겠다는 걸 의미하는 것 같은데, 저는 메마른 사람처럼 그냥 멀뚱멀뚱 바라보았습니다.
이 영화가 동명의 소설을 영화화한 것이라는 걸 영화를 본 뒤에 알았습니다. (저는 영화 정보를 거의 미리 찾아보지 않습니다. 기본 정보만 살짝 찾습니다. 저만의 감상이 방해를 받기 때문입니다. 영화를 본 뒤에 내 생각을 먼저 정리한 뒤, 다른 정보들을 찾는 편입니다.) 소설에서는 심리묘사가 잘 표현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러니까 영화화한 것이겠지... 아주 형편없는 영화는 아니었는데... 이렇게 쓰고 보니 아주 혹평이 되어버렸네요.;;; 한 줄 평을 쓰자면... 기대에 못 미친 영화였습니다.